마음이 답답해지면서 감자 샐러드 생각이 났다. 심야식당의 감자 샐러드 처럼, 한 입 맛보면 어쩐지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그런 기분이다. 굉장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인데도 마음이 꽉 막힌 것 같은데 정작 할 수 있는 일은 마땅히 없는 게 문제다. 답답해질 일도 아니고, 그럴 필요도 없으며, 웃으면서 진행할 수 있는 일인데도 왜 이렇게 되어야만 하는 걸까.
어린 시절엔 현실적 제약이라든지 좌절감 같은 걸 맛본 기억이 거의 없다. 그런 일은 중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일어났다. 하고 싶은 걸 할 수 없을 때, 그런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열 여섯이면 이미 다 컸지만, 그 시절에 그런 상태를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 담담히 인정하고 나가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자신이 바꿀 수 없는 것을 고민해 보았자 해결 될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마 그 때 부터였던 게 아닐까. 하고 싶은 걸 이 현실 세계에서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열심히 궁리하게 된 때가.
지금껏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아직 내 힘으로 이룬 것보다 해나가야 할 것들이 더 많고, 그것은 그것대로 내가 해결해야 할 어떤 의무일 것이다. 그런 것을 특별히 남과 비교해 보지도 않는다. 각자 처한 상황이 다르고, 그 안에서 나름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나는 나의 몫의 삶을, 다른 이는 그들 각자의 삶을 살아내는 거니까.
하지만 타인과 나의 삶이 만나는 접점에서,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내겐 힘들고 답답하게 느껴지는 것이 생긴다. 누구도 잘못한 사람이 없고, 다들 각자의 입장에서 자연스러운 행동을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이에서 나는 내가 아직 해결할 수 없는 의무를 발견한다. 그게 내가 내 힘으로 더 큰 것들을 이룰 때까지는 짊어지고 가야하는 것이겠지. 눈물 섞인 감자 샐러드를 먹으며, 마음을 다잡고 다른 이들을 이해하며 살아가야겠지. 인생이란 그런 거겠지.
고등학생도 아닌데 왜 시끄러운 음악이 땡기는 걸까. 귀청이 울리도록 볼륨을 최대로 놓고 노브레인 같이 시끄러운 펑크를 듣는다. 시끄러운 건 이제 나이가 들어서인지 못 듣겠다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옛날로 돌아간 상황에 내 기분도, 감정도 쉽게 그 시절 그 때로 돌아가 버린다. 사람은 정말 쉽게 변하는 건 아닌가보다. 억압적인 상황에서 내 선택이나 흥미 같은 건 빼앗기거나 박탈되어 버린 그 때, 그냥 음악을 들었던 것 같다. 음악을 귀에 걸어놓고 정처없이 거리를 걷거나, 버스를 타고 돌아다녔다. 혹은, 홍대 앞 라이브클럽에서 소다 같은 걸로 목을 축이며 밴드의 연주를 듣곤 했다. 나는 우울했고, 우울해야만 했고, 우울할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런 답답함이 내재되어야만 했나.
날 둘러싸고 있는 틀이 지겨웠고, 벗어나고 싶었고, 부숴버리고 싶었다. 떠나고 싶다. 그런 강렬한 욕망이 생긴 것도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자유롭게 살고 싶었고, 행복하고 싶었고, 유쾌하고 따뜻하고 싶었다.
왜 틀에 넣으려고만 할까? 억압하고 짓누르려고만 할까? 내 소망이나 선호, 생각 같은 건 중요하지 않은 걸까? 자유, 라고 외치며 죽을 때까지 싸우고 싶은 심정이다. 배낭 메고 떠나고 싶다. 떠난다고 해결되는 건 없다는 건 알지만. 하지만 때로는 해결되는 것이 없어도 떠나고만 싶을 때가 있다. 돌아올 걱정은 하지 않고, 몇 달이고 저렴한 현지 음식을 먹으며 세상을 걸어다니고 싶다.
어제 JK 김동욱의 조율을 반복해서 듣다가 저널 발표 준비를 했다. 그는 그 무대를 위해 2주간 꼬박 연습했을 것이고, 무대 위에서 주어진 겨우 몇 분 간의 시간 동안에 준비한 모든 것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그는 여러 사람 앞에서 그들에게 어떤 가치를 전달하기 위해 열심히 연습했고, 한정된 시간 안에 그것을 압축해서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저널 발표를 준비하면서도 이것이 결국 JK 김동욱의 작은 콘서트와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없이 저널을 읽어 상세히 이해하고, 이것을 이해하기 쉬운 형태로 가공하여 한정된 시간 안에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무대 위에서 감동을 주는 노래를 부르는 것과 무엇이 다른 것일까. 프리젠테이션도 그처럼 청중에게 어떤 임팩트를 주어야 하고, 가치를 전달해야 한다. 그런 마인드로 열심히 준비해서 나만의 작은 콘서트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보면 나는 어릴 적부터 뮤지션들에게 많은 영감을 얻곤 했다. 고교 시절에 열심히 놀다가도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는 건 홍대 앞에서 밴드들의 감동적인 공연을 볼 때였다. 그들이 열심히 연습에서 그런 뛰어난 연주를 할 수 있었듯이, 나도 내 일에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곤 했다. 음악을 좋아했지만 음악에 재능이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음악을 업으로 해야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음악은 취미로 남겨두고, 그들이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할 때 나 역시 내 일에 힘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지금에 와서도 내 삶에 에너지를 부여하고,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건 뮤지션들이라니 놀랍다. 또 꽂히는 음악을 찾아야 할텐데... 새삼 공연을 보러 가고 싶어지는 날이다.
날짜를 보니 벌써 1년이 다 되어가는 2011년 6월 12일. 한 TV 프로그램에서 어떤 가수가 부른 노래. 그 노래를 들었을 때 가슴이 울컥한 '느낌'이 왔고, 그 이후로 가끔씩 그 음악을 수없이 반복해서 듣고 있다. JK 김동욱이 부른 조율. 왜 그 노래를 들을 때 그런 뜨거운 느낌이 가슴에서 올라오는지는 모르겠다. 그런 식으로 가끔씩 처음에 들었을 때 꽂히는 노래가 있고, 수없이 반복해서 들어도 그런 느낌이 쉽게 사그러지지 않기도 한다.
오늘도 무심코 그가 부른 조율이 생각나서 몇 번인지도 모르게 반복해서 듣는다. 일상에서 쉽사리 재미가 찾아지지 않아서 무언가 신나고 재미있는 일을 찾고 싶다. 새로운 음악을 잔뜩 쌓아두고 들어도 마음에 드는 음악이 쉽게 골라지지 않는다. 수백 곡의 음악을 듣는 것보다 이렇게 꽂힌 음악을 수백 번 듣는 게 나을 수 있겠지. 수백 편의 소설을 읽기보단 꽂힌 소설을 수백 번 읽는 게 어쩌면 더 나을 수도 있겠지.
그러고 보면 어릴 적부터 무언가에 계속 꽂혀 있었던 것 같다. 음악이나 가수도 그랬고, 공부도 그랬고, 미술도 그랬고... 지금은 대체 뭐에 꽂혀 있는지조차 모르겠다. 무언가에 꽂혀서 누가 뭐라고 해도 내 생각대로 밀고 나갔는데, 지금은 그런 게 없으니 다른 사람의 기준에 따라 살게 되는 게 아닌가.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어떻게든 되게 만들려고 노력했는데, 지금은 하고 싶은 것도 많이 남지 않은데다, 그것마저 현실적으로 힘들다는 이유로 인해 접는 경우가 늘어간다. 앞뒤 재지 않고 저지르고 봤던 때가 좋은 것인지, 아니면 좀 더 현실적 상황을 고려하는 것이 좋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 가슴 속에 뜨거운 것을 잃어간다는 것이 슬픈 것이다. 그래서 잠시나마 그런 뜨거움을 느끼게 해주는 이 음악을 계속해서 듣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글을 쓴다. 일상을 정리할 여유도, 욕구도 상당부분 없어지다보니 반성도 없고, 발전도 없고, 그저 그날 그날을 살아가는 것만이 가능한 것 같다. 사람 때문에 힘들어도 그냥 끙끙 앓고 지나가는 것뿐이고, 답답한 마음을 풀기도 어렵다.
그냥 먹고 자는 것만이 아니라 더 높은 이상을 꿈꾸며 살아가는 것이 위선이고 고상한 척 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일까. 삶의 의미라는 게 어쨌건 그저 당장 현실적인 유리함을 쫓아서 윗사람을 싹싹하게 대하고, 이득 될 것 같지 않은 사람은 대충 버려두고, 좋은 사람인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밝고 활발했던 사람들이 점점 풀죽어 조용해져 가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슬픈 일인 것 같다. 서로 다를 수 있고, 그 다름을 인정하고 조화롭게 살아가는 와중에 발전이라는 것도 있을 터인데, 현실은 그런 공동체의 더 나은 미래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흐르지는 않는가보다.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내가 더 많이 차지하지 위해서는 옆 사람을 밟고 나가야 하는, 그런 슬픈 드라마를 써야 하는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