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art Alpha
I
중학생 때까지의 나는, 컴퓨터를 구석구석 이해하는 데 열성이었고, PC통신을 열심히 하며, 과학관련 서적을 탐독하던 학생이었다. 중3 때였던가, 과학잡지 Newton의 하이라이트 시리즈 중 '상대성 이론' 같은 책을 읽으며, 천동설의 모순점을 이론적으로 증명해보려고 노력하며, DNA 복제에 관한 엄밀한 이론을 추구했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 때의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가치있는 일은 과학고에 진학한 후, 카이스트 같은 학교에 진학하여 우주의 진리를 이해하는 일로 일생을 보내는 것이었다. '나는 누구인가' 따위의 의문에 몰두하며 인간은 어디에서 왔고, 세상은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우주는 무엇으로 구성되어있는가 같은 의문들에 대한 답을 찾고 싶었다.
결국 과학고 진학은 하지 못했지만, 그때 읽었던 '수학없는 물리' 같은 책들 덕을 계속 본 것 같다. 하지만 고등학교 생활은 지독히도 지루했고, 인생을 규율과 억압 속에서 오직 문제풀이 기계 취급을 받으며 사는 것을 견뎌내기 힘들었다. 당시의 나는 스타크래프트 등 컴퓨터 게임 따위나 게임센터의 드럼 매니아, 기타 프릭스 같은 리듬액션 게임에 매진하며 별 보러 다니는 것을 즐기고, 홍대 앞에서 열리곤 했던 좋아하는 밴드들의 라이브 클럽 공연을 놓치지 않았던 평범한 소년이었다. 그러다 고교 2학년 1학기를 마친 때였던가, 무언가 그렇게만 아무런 두각 없이 평범하게만 흘러가는 일상에 질렸던 것 같다.
그 때,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해보았다. 그 때의 결론에 따르면, 내가 좋아하고, 하고 싶어하는 것은 크게 네 분야로 나뉘었고, 그것은 지금도 크게 변화가 없는 것 같다. 첫 번째가 역시 물리학이었고, 나머지가 문학, 미술, 음악이었다. 이 중 음악만은 그 때까지의 경험으로 전혀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으므로, 취미로만 하리라고 생각했었다.
이미 그만둘 기회를 놓쳐버린 고교생활은 고3까지 이어졌고, 상황이 어떻건 물리학을 공부하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고통스런 문제풀이 기계로서의 생활을 버텨냈던 것 같다. 그래서 어쨌든, 나는 원하던 대로 물리학과에 진학했고, 물리학을 공부하기 위해 대학에 온 만큼 열심히 공부했다.
II
대학에 처음 들어올 때 나에게는 소박한 꿈이 있었다. 그 당시엔 돈도 없었고, 방법도 몰랐기에 그냥 뜬구름 같은 망상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유럽에 가보고 싶었다. 무슨 허영인지, 아니면 어디서 주워들었는지는 몰라도 유럽대륙에 두 발을 딛고 싶었다.
끔찍하게 어려운 전공에 한창 고생하고 있던 2학년 첫 학기 5월, 한 학번 선배 커플과 밥을 먹다가 '여름 방학 때 뭐 할 거냐?'라는 질문에 특별히 할 것 없다는 답변밖에 없던 그 때, '그럼 여행이나 한번 다녀와'라는 한마디에 2개월만에 암스테르담행 비행기에 몸을 싣게 될 지 그 땐 알았을까. 그 때, 10개국 이상을 두 발로 누비게 되는 여정이 시작될 지 알았을까.
III
나는 물리학을 공부하기 위해 대학에 왔다. 하지만 물리학 외에도 정말로 많은 일을 해왔던 것 같다. 수많은 학교행사도, 2년이 넘는 군생활도, 벌써 누적 5개월이 된 직장생활도, 또 그에 필적할 기간 동안의 여행도, 긴 대학생활 동안 해왔던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면 유학을 가든지 해서 물리학 박사가 되는 길로 가야 할까? 글쎄, 그런 것들이 현실과 동떨어진 먼 일로 생각된다. 철없던 고교시절에, 물리학을 공부하겠다고 마음 먹었을 때도 그런 느낌이었을까. 대학 2년생일 때 처음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을 때도 그랬을까. 지금 나의 꿈은 무엇인가? 무엇을 이루고 싶은가?
Part Beta
A
오랜만에 이대 앞 티앙팡에서 Pierrot군을 만났다. 우리들은 IBM 인턴 시절의 추억을 이야기하며, 다음 주에 시리아로 떠난다는 녀석을 부러워했다. 같은 블로거 패밀리인 Jamie 씨는 준비하는 일 때문에 참석하시지 못해서 아쉬웠다. Pierrot군의 여행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문득 궁금해졌달까.
티앙팡은 훌륭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적어도 홍차에 관해서는 상당히 실망했다. 명성에 어울리지 않은 질이다. 보이차는 괜찮은 것 같던데. 애프터눈 티 세트 같은 메뉴는 보지 못했지만(런치는 있던데) 어떻게 나오든 종로의 티포투에 미치지 못하리라고 생각된다. 세트가 아니라 홍차만 마신다고 생각해도 대학로의 차야가 훨씬 훌륭하다.
뭐 어쨌든, 상당히 다양한 차를 구비하고 있다는 점만은 높이 살만 하다. 그러나 홍차를 꽤 즐기는 나로서는 별로.
B
현재가 지나칠 정도로 행복하면 오히려 슬픈 법이다. 미래에 이보다 행복하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어디론가 도망가 버리는 것, 어쩐지 소설 속 이야기 같지 않은가. 누군가 조사를 해보지만 아무런 동기를 찾을 수 없다든가 하는 것. 아무런 이유도 없는데 애초에 존재하지조차 않았던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
C
내가 능력이 없는 인간이라고는 결코 생각해보지 않았던 사람으로서, 나의 긍지를 훼손하는 취급은 어쩐지 싫다고 할까. 세상의 기준이 뭔지 모르겠지만, 내가 탈락할 기준이라면 그 기준 자체가 제대로 된 것이 아니라는 나의 오만함.
D
가끔 멈춰서서 둘러보기. 스무 살이 막 되었을 땐 변해가는 자신이 슬펐다. 지금은 변하지 않는 자신이 슬프달까.
Part Gamma
긍지를 가지고.
치열하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