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까지는 공부하느라 바빴고, 9월에는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으며, 10월에는 유유자적하게 수업 하나 들으면서 고3 아이 과외를 했었다. 아무래도 10월에 너무 게으르게 지낸 탓인지 이번 달 들어서는 매우 바쁜 일정이 계속되고 있다.
과외는 지난 주 월요일에야 겨우 마무리 지었고, 그 와중에 놀고 먹을 수만은 없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고 있었는데, 우연치 않게도 학교 근처의 모 기관에서 행정인턴 자리가 나와서 덥썩 물었다. 행정인턴이라 함은, 이번 정부에서 청년실업을 구제하겠다는 목적으로 만든 저임금의 임시직을 일컫는 말이다. 나 역시 짧지만 취업 전선에 있었고, 주변에 취업을 준비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취업이런 것 자체가 지나치게 힘들지 않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적절한 자리를 찾지 못한 청년들에게 임시로 자리를 마련해주는 제도가 행정인턴이라는 것인데, 나 같이 엄한 사람이 자리를 꿰차고 있으니 이건 분명히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올해까지 예산을 집행해야 하는지 5주짜리 인턴을 뽑았는데, 이래서야 이곳에서 경력을 쌓아 그것을 발판으로 자신의 커리어를 개척해 나가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하는 의심이 든다. 물론, 그런 생각을 이쪽 기관 관계자들도 했기 때문에 인터뷰에서 '일주일에 한번 수업은 들어야 되고 내년엔 대학원 갑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나 같은 인간을 뽑을 수밖에 없는 게 아닌가 싶었다. 내가 인터뷰어라면 제대로 커리어를 만들어 나가고 있는 사람을 뽑는 것이 상당히 미안했을 것 같다.
어쨌든 집에서 뒹굴거리는 대신 무언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니 개인적으로는 잘 된 일이다. 물론, 오랜만에 풀타임으로 일하니 피곤하기도 하다. 게다가 오늘은 이메일을 확인하니 작년 이맘 때쯤 아르바이트로 했던 해외 대학 관련 정보 집필을 다음 주부터 추가로 작업하자는 소식을 받았다. 얼마 전에 작업 의향을 물어보는 이메일이 왔길래, 진로를 바꿨지만 가능하다고 답을 보낸 결과다. 학교 수업이 그다지 부담이 없긴 하지만 다음 달까진 이래저래 꽤나 바쁜 일정이 될 것 같다. 뭐 그 때까지 돈이라도 좀 모아두면 내년까진 빚 안 지고 내 힘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마음은 좀 편하겠지. 내년 1월엔 오랜만에 여행을 좀 다녀오려고 하는데 일정이 허락되면 좋겠다.
2_만남
최근에 한동안 못 만나던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물론, 개중에는 도저히 시간이 안 맞아서 못 본 경우도 있고, 어떻게 연락도 닿고 시간도 잘 맞아서 쉽게 재회한 경우도 있었다. 오랜만에 보아도 다들 자신의 삶을 잘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선택한 길에 대해서도 처음엔 놀라워 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의 충격은 아닌 것 같았다. 물론, 내가 이런 길을 가게 된 이유를 다 이해하긴 힘들겠지만, 의도라는 것이 어쩌면 나 자신의 만족을 위한 것이지 다른 이들에게까지 의미 있는 것은 아닐 수 있기에 그냥 이런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학부 시절에 했던 다양한 경험들과, 작년에 겪었던 일들, 그리고 고민들의 결과가 나타난 것일 뿐. 그런 과정을 통해 결정한 것은 삶의 방식이었고,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여러 길들 중 하나가 우연찮게 내 앞에 주어진 것이다.
요새 대학원 동기들도 그렇고, 일터에서 만나는 직원들과 다른 인턴들도 그렇고, 새로운 사람들 역시 계속 만나게 된다. 이래저래 사람들과의 만남도 즐겁고, 계속 잘 해 나가는 것을 보면 이십대에 나의 성격은 ENTJ로 계속 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절판된 맥킨지 ex-BA 이상현씨의 '브리프케이스'도 운좋게 헌책으로 구하게 되었는데, 내가 컨설팅 업은 (적어도 당분간은) 하지 않게 되었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그리고 그것을 실제 구현하고 있는 컨설팅 업에 대해 여전히 관심이 간다. 물리학도 그랬고, 컨설팅도 그랬고,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앞으로 어떤 시스템을 만들어 나갈 수 있을까.
3_다윗과 골리앗
작년인가 동네에 부부가 운영하는 베이커리 옆에 파리바게트가 들어왔다. 둘 사이에 작은 핸드폰 대리점 하나뿐이었으니 정말 '코앞이다'라는 말이 적격이었다. 처음에 파리바게트가 들어왔을 때부터 '이건 너무하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었다. 물론, 프랜차이즈로 운영하기 때문에 점주는 파리바게트의 직원은 아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파리바게트에서 그 위치를 지목하고 그곳에 입점하기를 권유했다고 한다.
그곳에 파리바게트가 생긴 이래로 나는 단 한번도 빵을 사지 않았다. 오히려 옆에 있는 부부 베이커리에서는 몇 번 빵을 팔아주었다. 가히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고 할 만 했다. 그래도 부부 베이커리는 그동안 그럭저럭 자리를 잡았던지 최근까지 꽤나 잘 버텨왔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파리바게트에서 20% 세일이라는 공격을 감행했다. 그에 대항해 부부 베이커리는 무려 50% 세일이라는 초강수를 두었다. 기간이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맞불작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일이 끝난 다음 날, 부부 베이커리는 텅 비어 있었다. 가게를 접은 것이다.
물론 한 개인이 거대 자본에 대항한다는 것이 힘들 것이다. 객관적으로 보아도 그 상태로 부부 베이커리가 경쟁력을 갖춘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성공한 개인 베이커리를 벤치마킹해서 고급 과자를 팔고, 프랜차이즈 베이커리가 갖추지 못한 수제 빵들을 선보일 수는 없었을까? 그것이 부부 베이커리의 부부 스스로의 힘으로 하기 어렵다면, 그런 일을 도와주는 사람들이 존재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이 참으로 안타깝게 느껴졌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사회적 기업이 존재한다면 어땠을까. 부부 베이커리에 투자를 하는 동시에 경쟁력을 갖추게 해주었다면 어땠을까. 돌아보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일들은 많이 있다. 지금은 누군가 내게 준 일밖에는 수행하지 못하지만, 조만간 내가 주도해서 이런 일들을 하고 싶다. 사회적 기업을 꿈꾸는 내 지인들도 꼭 세상을 바꾸어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고교 시절까진 정말 음악을 좋아했었던 것 같다. 홍대 앞에서 공연을 보곤 했는데, 대중적인 인기는 없어도 자기 취향의 음악을 나름대로 열심히 하던 밴드들도 참 좋았더랬다. 우리 반에도 공부엔 별로 취미가 없지만 나름 음악을 하겠다는 친구들이 있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전기기타를 사고, 연습을 하고, 곡을 쓰고... 나는 그런 친구들이 좋았다.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는 것, 세상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내가 세상을 바꾸겠다는 기세로 달려드는 친구들이었다.
오늘 거의 1년 만에 물리과 후배들을 만났을 때도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경영대 나온 친구들 처럼 사회에 적응 잘 하고 '빠릿빠릿' 하지는 않지만, 공부하는 게 좋아서 딱히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그것에 열정을 쏟는 것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수석 입학 및 졸업을 한 똑똑한 친구는 공대 대학원으로 진학을 했고, 공대에서 물리학을 double major로 했던 친구는 물리과 대학원으로 진학을 했다. 나는 Medical School로 가고, 다른 한 친구는 유학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무엇을 하든 자신의 분야에 애정을 가지고 순수하게 공부가 즐거워 열중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 역시 물리학을 하던 때의 열정을 잊지 말고 앞으로 내가 갈 길에 매진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회사를 다니고, 비즈니스 세계를 접하면서, 때론 순수학문을 하는 이들의 모습이 답답할 때도 있었지만, 세상에 나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기왕 맞추는 거라면 세상을 나에게 맞춘다는 믿음을 가지고 전진해 보았다는 것은 정말 중요한 자산이 아닐까 새삼 생각해 본다. 때론 세상에 나를 맞추어야 할 때도 있을테지만, 언젠가는 내 생각대로 세상을 변화시키리라는 소망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야겠다.